육체적 사랑을 뛰어 넘어 진정한 예술인의 정을 함께 나눈 정철과 진옥의 우정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극중 한 장면)
송강 정철(1536~1593) 초상
신분을 벗어나 서로를 배려하는 진솔한 사랑은 존경과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
송강 정철의 묘소
지금도 달밝은 밤이면 진옥과의 애절한 사랑을 詩 한 구절로 나누고 있을까
진정으로 강한 쇠는 구부러지지 않고 끊어진다는 옛말이 있다. 여기 이 풍진 세상과 한 치도 타협하지 않고 끊어져버린 쇠를 따뜻하게 녹인 옥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송강 정철의 여인 진옥이다.
비록 기생 신분이었지만 진옥의 예술적 재능과 그를 향한 애정은 모함으로 임금의 미움을 받아 귀양살이를 하게 된 정철의 착잡한 마음을 안온하게 달래주었다.
#1. 쓸쓸한 유배지에서 그녀를 만나다
귀뚜라미가 처량하게 울어대고 마른바람소리가 스산한 어느 가을밤이었다. 멀리 있는 임금부터 가엾은 백성 그리고 자신의 처지까지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쉬이 잠들지 못하던 송강 정철(1536~1593) 귀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없이 사뿐히 들어서는 여인. 얼굴을 가린 장옷을 벗으니 절색의 미모가 모습을 드러냈고, 정철은 깜짝 놀랐다.
"대감, 저는 진옥이라 하옵니다. 일찍이 대감의 명성을 익히 들었아오며, 특히 대감의 글을 흠모해왔습니다."
한낱 기생이 자신의 글을 읽고 자신을 사모해왔다니 정철은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한양에 살던 때부터 수백 번 이상 기방에 드나들었지만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정도로 재능 있는 기생은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철이 "얼굴도 보지 나를 사모했단 말이냐?"라고 묻자, 진옥은 정철의 의구심을 풀어주겠다는 듯 詩 한 구절을 읊었다.
居世不知世 (거세부지세) /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모르겠고
戴天難見天 (대천난견천) / 하늘 아래 살면서도 하늘 보기 어렵구나
知心唯白髮 (지심유백발) / 내 마음을 아는 것은 오직 백발 너 뿐인데
隨我又經年 (수아우경년) / 나를 따라 또 한 해 세월 넘는구나
그녀가 읊은 詩에 귀 기울이던 정철은 놀라고 만다. 머나 먼 타지에서 고독을 벗 삼으며 귀양살이 중인 자신의 처지와 세월의 무상함에 대해 서글픈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정철 자신의 마음을 열어본 것처럼 현재 정철의 심정을 정확하게 이해한 진옥. 이날을 계기로 송강 정철의 마음속에 진옥에 대한 애정이 싹트기 시작했음은 물론이다.
#2. 강철 같은 남자의 험난한 인생길
정철은 부친이 병조판서 (지금의 국방장관)를 지내는 등 빼대있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전형적인 '신동'의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진사 시험에서 장원으로 급제한다. 그의 큰누나는 인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였고, 둘째 누나는 왕족인 계림군의 부인이었기에 정철은 어려서부터 궁궐에 자주 출입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왕세자였던 경원대군과도 어릴적부터 친분을 쌓았다. 성장한 후에도 누이를 만나러 입궐할 때면 동궁을 자주 들를 정도였다. 그가 27세 되던 해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자, 합격자 명단을 본 명종이 기뻐하면서 따로 축하연을 베풀어주기도 했다. 명종이 바로 어린 시절 그와 우정을 나눈 경원대군이었다.
그러나 관직에 오르고 나면 사람도 조심히 만나고 말도 쉽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둥서고금의 진리 아닌가. 정철은 성격이 강직하고 바른 소리를 잘하는 천성이었기에 명종의 비위를 자주 상하게 했다. 명종의 사촌 형 경양군이 처조카를 죽인 죄로 수감되었을 때 명종이 관대하게 처리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정철은 왕족이라고 예외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며 명종의 청을 거절하고 경양군을 사형에 처했다. 이를 계기로 명종과 우정에 금이 가고, 명종은 그를 피하게 된다.
실제로 뒤에서 욕하는 것을 싫어하고 앞에서 비판하는 직설적인 성격 탓에 정철에게는 적이 많았다. 절친인 율곡 이이의 '제발 술 좀 끊고,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충고 역시 귓등으로 듣던 정철, 자신의 정치적 재능과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임금의 총애까지 분명 충분히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을 법한 환경이었지만, 그의 인생에 타향살이가 많은 것은 어찌 보면 성격 탓일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 선조 대에 이르자, 정철의 정치 인생은 점점 더 소용돌이에 빠졌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치열한 당쟁에서도 선조가 그를 아끼고 두둔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회의를 느끼고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더라도 선조는 몇번이고 그를 불러 다시 관직에 앉혔다. 강원도 관찰사, 전라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 등으로 부임한 정철은 전국 각지의 실상을 밝히고 그때까지 이어져 내려오던 여러 폐단을 개혁하는 등 관찰 임무를 잘 수행해 선조에게 인정을 받았고, 그에 대한 민심도 상당히 좋았다. 그 유명한 <관동별곡>과 <훈민가>가 관찰사 시절에 지은 불세출의 名詩다.
그러나 이 시대의 '임금의 총애'란 하룻밤에 생겼다가도 하루아침에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 아니었겠는가. 선조의 몸이 약해 자주 병에 걸리고 나이 역시 마흔을 넘기자 대신들 사이에서는 후사를 얼른 정해야 한다는 공론이 있었다. 당시 영의정이던 이산해는 정철을 매우 경계하며 그를 제거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인물이었다. 그는 선조의 총애를 받던 인빈 김씨의 소생인 신성군을 세자로 밀고 싶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좌의정 정철과 우의정 유성룡 등 조정의 여러 대신과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하자고 의논한 후, 뒤에서는 인빈 김씨 집안에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고 신성군 모자를 없애려 한다'고 말한다. 이에 인빈 김씨는 선조에게 울면서 호소한다.
"전하, 살려주십시오. 정철이 저희 모자를 죽이려 하니 궐밖으로 내보내주시옵소서!"
세자책봉을 건의하기로 한 날, 이산해는 와병을 핑계를 나오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정철은 선조 앞에 나아가 "총명한 광해군에게 사직을 맡겨야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선조는 "과인이 아직 젊은데 경이 세자 세우기를 청하니 어쩌자는 것이냐"며 노여워했다. 결국 정철은 이산해의 계략에 휘말려 파직당하고 만다. 정철의 길고 긴 유배 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명천에서 귀양살이를 시작한 정철은 다시 진주, 그리고 강계로 옮겨진다. 이곳에서 그는 아리따운 여인을 만나는데, 그녀가 바로 기생 진옥이다.
#3. 언어유희 속에 사랑이 꽃피다
진옥은 정철을 만날 때까지만 해도 이름 없는 지방 기녀에 불과했다. 무명 기생이 갑자기 이름을 떨치게 된 데는 강계에서 귀양살이하던 송강을 만나 연을 맺었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그녀는 송강 정철 앞에 마주 앉아 서로 詩를 주고받으며 풍류를 즐겨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출중한 예인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끝 간 데 없이 외롭고 괴로운 귀양살이에서 진옥의 재기 넘치는 말솜씨와 글솜씨 그리고 가야금의 선율은 정철의 답답한 마음을 잠시나마 달래주는 유일한 휴식처였다. 두 사람의 관계를 그저 기방에 드나들던 양반이 기생을 희롱하고, 기녀는 그의 총애를 이용한 것이라고 폄하하기에는 아까운 구석이 많다. 기지와 해학이 가득한 詩로써 서로를 향한 마음을 대신했던 두 사람의 작품은 시조집 <권화악부(權化樂府)>에 실려 있다. 그녀를 향한 열망이 무럭무럭 자라나 주체할 수 없을 때쯤 정철은 그녀에게 농염한 애정 詩를 한 구절 보낸다.
옥이 옥이라 하거늘
번옥(燔玉)으로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이 분명하다
내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볼까 하노라
이 詩에서 번옥이란 돌가루를 구워 만든 가짜 옥을 말하며, 살송곳은 남자의 성기를 의미한다. 진옥의 이름을 따 詩를 짓고 그 속에서 진옥을 칭송함과 동시에 그녀를 유혹한 것이다. 정철의 詩가 끝나자 진옥은 가야금을 내려놓고 바로 화답 詩를 지었다.
철(鐵)이 철(鐵)이라 하거늘
섭철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이 분명하다
내게 골풀무 있으니
한번 녹여볼까 하노라
여기서 섭철이란 잡다한 쇳가루가 섞여 순수하지 못한 잡철을 뜻한다. 우리말로는 '무른쇠'다.
물컹한 싸구려 쇠라고 여겼는데 알고 보니 정철, 즉 순수한 철이더라는 것이다. 골풀무는 불을 피울 때 바람을 불어넣는 기구를 말하며, 詩에서는 남자의 성기를 녹여내는 여인의 성기를 의미한다.
송강 정철이야 조선 제일의 문장가로 한손에 꼽히는 詩人이기에 사람의 이름을 주제로 詩를 읊었다거나 작품에 은유적 표현이 가득하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진옥은 정철의 詩에 숨겨진 참뜻을 바로 알아차리고 심지어 한술 떠 뜨기까지 한 것이다. 후세 많은 문학평론가들은 번옥에는 섭철로, 진옥에는 정철로, 살송곳에는 골풀무로 대응하는 대구법이야말로 기생 진옥의 뛰어난 실력과 재치를 일거에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는다. 언어유희의 달인들이 남녀로 만나 사랑에 푹 빠졌으니, 이들이 주고받은 詩가 과연 이 두 작품뿐이었을까?
#4. 사랑은 비(雨)처럼 이별은 詩처럼
寒雨夜鳴竹 (한우야명죽) / 야밤에 찬 빗줄기는 대숲은 울리고
草蟲秋近床 (초충추근상) / 가을이라 풀벌레는 침상 가까이 다가오네
流年那可駐 (유년나가주) / 흐르는 저 세월을 어찌 머물게 하리오
白髮不禁長 (백발부금장) / 길어지는 백발을 감히 막을 수 없네
지금이라면 모를까, 당시 56세면 그야말로 노인의 나이, 물론 독서와 사색에 잠겨 시간을 보내고는 있지만 늘그막에 겪는 귀양살이가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대나무 숲에 비가 내려 울려 퍼지는 빗소리를 듣던 가을밤, 옆에는 젊고 아리따운 절세미인 진옥이 있으나 상대적으로 늙은 자신을 바라보니 훌러가버린 세월이 아쉽기만 한 것.
임금이 '주색에 빠져 있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기방을 드나들며 술과 여자에 빠졌던 정철. 사실 그를 스쳐간 기생의 수는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철이라는 인물을 이야기할 때 언급되는 기생의 이름은 진옥이 유일하다. 오직 진옥 한 여인만을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것이다.
<권화악부> 송강첩(松江妾)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점 역시 진옥이 정철에게 매우 특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조 문헌에 '00의 첩(妾)'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진옥이 유일하다고 한다. 많은 기생이 양반의 첩 생활을 했고 조선 사회에서 양반의 축첩은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이렇게 문헌에 기록된 경우는 오직 진옥뿐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란설을 주장했던 이산해가 파면되면서 자연스레 정철의 귀양살이도 끝나게 되었다. 세상사는 다 인과응보인 것이다. 정철을 궁지에 몰아 귀양가게 헸던 이산해의 정치인생도 불명예로 마감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 관직에 오른다는 것은 진옥과 헤어져 한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 진옥은 그를 잡거나 따라가겠다고 매달리지 않았다. 대신 구슬픈 詩를 읊으며 정철을 떠나보내고 만다. 애달픈 작별 인사조차 이들에겐 예술 같은 한 장면이었던 것이다.
人間此夜離情多 (인간차야이정다) / 오늘 밤도 이별하는 사람이 많겠지요
落月蒼茫入遠派 (낙월창망입원파) / 슬프다. 밝은 달빛만 물 위에 지네
惜簡今硝何處佰 (석간금초하처백) / 애닯다. 이 밤을 그대는 어디서 자렵니까?
旅窓空廳雲鴻過 (여창공청운홍과) / 나그네 창가에는 외로운 기러기 울음뿐이네
한양에 남아 있던 정철의 부인 유씨는 남편에게 진옥을 한양으로 데려오라고 권했고, 정철 역시 진옥에게 그 뜻을 물었지만 그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리고 그와의 추억이 남아 있는 강계에서 지내며 그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고 평생 혼자 살았다고 한다.
조선 제일의 詩人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수많은 산문과 시조를 남긴 정철, 혹자는 그가 술을 좋아했기에 취기를 바탕으로 멋진 작품을 내놓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진옥의 가야금 소리를 들으며 그가 지어낸 詩만 해도 수백 편이 아닐지. 애석하게도 두 사람의 애정이 담긴 詩는 대부분 기록되지 않은 채 400년 전 두 사람만의 비밀로 남았다.
우리는 학창시절 <관동별곡> 등 정철이 읊은 시조 속의 '님'은 언제나 한양에 있는 임금을 의미한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그가 진옥의 앞에서 나지막이 읊조린 시구만큼은 온전히 진짜 님을 향한 바로 그것이었다. 그 시어들은 진옥의 가슴에 절절히 남았을 것이니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좌의정의 반열에 까지 오른 정치가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문장가 정철이 이산해의 중상으로 억울한 귀양살이를 하면서 진옥같은 진정한 사랑과 예술을 아는 여인이 없었다면 얼마나 쓸쓸했을까. 송강 그가 귀양지에서 나눈 사랑, 그것은 육애(肉愛)만이 아니라 뜻이 통하는 참된 얘술인과의 깊고도 뜨거운 교감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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