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春雨)
춘우암서지(春雨暗西池)/봄비 보슬보슬 서쪽 연못에 내리니
경한습라막(輕寒襲羅幕)/가벼운 한기 비단장막으로 스며드네
수의소병풍(愁依小屛風)/시름겨워 작은 병풍에 몸을 기대니
장두행화락(墻頭杏花落)/담장 머리로 살구꽃이 떨어지는구나
그리움의 계절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의 詩입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봄날, 시인은 보슬비 내리는 광경을 보다 문득 한기를 느낍니다. 그 한기는 옷섶을 헤치며 살 속으로 파고들어 여인의 마음을 울리고, 그런 시름에 겨운 마음으로 담장을 바라보니 하릴없이 살구꽃이 지고 있습니다.
봄은 여인에게 있어 그리움의 계절인가 봅니다. 그리고 그리움이란 속절없는 사랑의 아픔으로 여인의 마음에 깊은 상흔을 남깁니다. 그 상흔이 이 詩에서는 담장 위에 떨어진 살구꽃으로 시각화되고 있습니다.
봄비에 젖어 담장 위에 꽃잎이 쌓이듯, 시름에 겨운 여인의 마음속에 그리움이 켜켜이 쌓입니다. 그리고 봄에 만물이 소생하듯, 그 그리움 속에서 순결한 사랑이 싹틉니다. 그리움이야말로 사람을 키우는 자양분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제 바야흐로 봄의 문턱입니다. 새 문 여는 소리들로 온 누리가 들썩거리고 있습니다. 제 문설주를 활짝 열어젖히듯 곧 꽃잎이 그 망울을 터뜨릴 것입니다. 시새운 바람이 몇 번쯤 얼굴을 휘갈기고 지나도 꽃은 한사코 필 테고, 그리움은 그만큼씩 더 붉어질터. 우르르 피고 지는 꽃들로 봄도 한층 새붉어져 가리라.
그럴 즈음 지는 꽃잎 하나를 받아들고 모처럼 두리번대는 헐렁한 오후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 꽃잎을 놓아주고 싶은 조막손이 가까이 없어 애간장이 탈 때 세상의 시계란 시계들이 조금씩만 느리게 가기를, 모든 꽃잎이 그리운 문앞으로 시들기 전에 당도하기를,
하여 올봄에는 향기론 꽃 이야기 한 편씩을 으늑히 품으시기를, 아니 그보다 먼저 꽃들을 눈여겨보고 하나쯤은 손안에 가슴안에 고이고이 받아보시길.
무릇 귀하고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들은 순간에 하르르 무너져내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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