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야· 최영록 詩人님

[스크랩] 내 청춘의 너덜겅엔 아직도 그 노인과의 마지막 숨결이 뜨겁게 여울져내리지

° 키키 ♤ 2012. 11. 6. 03:02

 

 

 

                     내 청춘의 너덜겅엔 아직도 그 노인과의 마지막 숨결이 뜨겁게 여울져내리

 

  오래 전 자정 근처의 시간에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강남 일원동 어느 병원 원무과라 밝힌 곳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야심한 시각 전화기 유닛을 헤집고 들려오는 기계음은 임종을 앞둔 어느 노인이 나를 한 번 봤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순간 헤아릴 수 없는 혼돈의 블랙홀에 빠져 든 마음을 추스리며 환자가 누구냐고 물으니 만나보면 알게 될 것이라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너무 황당하고 일말의 불쾌감 내지는 불안감 같은 것이 뇌세포를 극도로 자극시키며 짧은 시간에 혈압수치를 상승시켰다. 그러나 누군지는 모르지만 죽음을 앞둔 사람의 부탁이라니 무시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를 몰고 갈까하다 성급한 운전으로 차량통행이 뜸한 도로를 고속질주하다 사고라도 나면 안되겠다 싶어 택시를 잡아탔다. 강남 그 병원으로 최단거리로 최단시간에 가자고 기사 양반을 다그쳤더니 목동아파트 단지 외곽도로를 끼고 목동운동장, 이대목동병원을 단숨에 내달아 올림픽도로로 차머리를 사정없이 들이 민 택시는 그야말로 총알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한적한 도로를 고속주행하는 택시 안, 그것도 정면 충돌사고시 그나마 안전하다는 조수석 뒷자리에서 가운데쪽으로 살짝 중첩된 황금분할의 로얄석에 엉거주춤 앉아서 곰곰 생각해 보았다.

  아직 누군지도 잘 모르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을 만나러 가는 중에 이러다가는 그 사람을 보기도 전에 내가 먼저 죽음을 맞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에 어찌할바를 몰라 눈을 질끈 감고 빨리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얼마나 세게 밟았던지 요금을 건네는 나에게 기사양반은 택시운전 20여 년 만에 서울 도심에서 이렇게 속도를 높혀 운전해보기는 처음이라며 상기된 웃음을 흘렸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나도 모르게 급히 요동치는 심박동소리를 비집고 아! 하는 짧은 탄성이 튀어나왔다.

  황급히 병원문을 밀치고 들어서자 가족인듯한 50대로 보이는 부부가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을 따라 호스피스 병동으로 안내되었다. 다시는 향유할 수 없는 이세상에서의 소풍을 끝내려는 임종을 앞둔 환자들이 즐비한(?) 이승의 마지막 거소인 병실 맨 끝자락 창가의 침대에 이르러 나를 찾고 있는 환자를 보는 순간, 지금까지 나를 천근 돌덩이로 짓누르던 모든 의문이 일순에 새벽 물안개로 사라졌다.  

  나와는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는, 더군다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순간에 더 더욱 찾을 이유가 없는 그 사람은 오래 전 나

  경기도 부천 도당동에 위치한 전체 종업원이라야 100여 명도 채 안되는 한 중소기업의 인사노무 관련 업무 중역으로 일하고 있을 때, 어느날 경비원 한 사람을 소개했다. 자기가 잘 아는 분인데 한 달 정도 일을 시켜보고 정규직 채용여부를 결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중소기업이 그러 했듯이 열악한 환경속의 2교대 근무를 해야하는 제조업체에서 연로한 나이에 이틀에 한 번 꼴로 밤샘근무를 해야하는 경비원의 일상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거기에다 근태현황관리, 입출차관리, 외부 방문인사 안내, 청소위생업무, 방범.방화 등 잡다한 업무가 하루 종일 구부정한 어깨를 더욱 짓누르는 고된 나날의 연속이었다.

  최씨는 우려의 눈길을 불식시키고 보란듯이 성실하고 책임감있게 일하는 모습이 원리원칙을 고집하는 내마음에 들었고 얼마 후 정규직으로 채용되어 나와 함께 몇 해를 일하게 되었다. 일하는 몇 해 동안 그는 아버지처럼 자상하고 인자하게, 듬직하고 빈틈없이, 성실하면서도 때로는 강단있게 모범사원으로 근무하는 것이 인정되어 선임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학벌이나 연고를 인사 고과에 그다지 반영치 않고 오로지 능력을 최우선 잣대로 삼는 나의 배려로 경비반장을 거쳐 안전총괄팀장(부장대우)으로 전격 승진되어 동료들의 부러움과 시샘을 사기도 했다.

  살을 에이는 한 겨울 야간근무하는 최씨를 찾아 따뜻한 커피 한 잔, 초코파이 몇 개를 건네며 마치 막내가 재롱을 부리듯 수고 많으시다고, 남들이 잠든 힘겨운 시각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기 할일을 다하는 당신들이 있어 회사가 안전하게 지탱하고 모든 임직원들이 편히 집에서 쉴 수 있는거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리곤 했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전무이사 승진과 사장에 버금 기획과 설계, 생산설비구입, 전문인력확보, 내수시장개척, 수출거래선 확보 등으로 전경연, 중소기업청, 상공회의소, 무역협회, 산업은행, 기업은행, 수출입 은행, 특허청, 표준협회, 생활용품시험검사소, 생기연 등 어느 날 불쑥 최씨가 찾아왔다.

  반가운 마음에 조용한 곳으로 모셔 지난 이야기로 회포를 푸는데 아직 다 비우지도 않은 잔에 소주를 가득 따르며

  

  그 경비원 최씨가 이었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게 된 것이다. 그런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살갑고 정중하게 예를 갖춰 대해드렸어야 했는데 그러하지 못한 게 진한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그는 나를 친아들처럼 인자하게 또는 직장상사로서 깍듯이 대했으며 원칙있는 열정과 소명의식 성실과 근면으로, 누가 보지 않아도 누가 칭찬하지 않아도 최선을 다해 일하는 부족했던 나를 몇 해 동안 말없이 눈여겨 지켜보았던 것이다.

  그 믿음과 인간성에 온 몸에 전율과 함께 소름이 돋고 숨골이 저려오는 흥분과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자주 찾아뵙지는 못했지만 당신의 결혼기념일 이라든지 생신일, 어버이날이나 명절 전에는 잊지 않고 인사를 드렸으며 한 해 두 세 차례 온천이나 관광지를 함께 모시고 다니며 돌아가신 아버님을 대하듯 나름데로 은공을 잊지않으려 정성을 쏟곤 했었다.

  당시 몇 해 전부터 회오리치기 시작한 미국발 금융위기를 필두로 전세계적으로 불어닥친 경제불황의 여파는 특히 중소기업의 가느다란 숨통을 조이는 아킬레스건으로 대두되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손익계산서에 붉은 글씨로 기제된 그때의 부인할 수 없었던 현실이 언제 쯤 종지부를 찍을지 안타까운 마음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어려운 시대에 신화가 탄생한다는 말이 있듯이 개인적으로 뒤늦게 시작한 공부 학위논문 준비하랴, 회사업무 이외 개인적으로 벌려 놓은 일, 문화예술 활동, 사회봉사 활동, 또 그 사이 오랜 병석에 계셨던 어머님을 여의느라 당시 최씨를 찾는 일에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워낙 연로하셔서 그런지 몰라보게 변해버린 세월의 손돌바람 흔적을 그의 초췌한 얼굴에서 여실히 읽어낼 수 있었다. 여러 해가 지났고 해매다 한 두 번은 해서 안부를 살피곤 했었는데 어쩐일인지 작년에는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자기의 임종을 지켜내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에 대신 나를 찾았다는 것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님 임종시의 모습이 최씨의 병색이 완연한 삶을 포기한 얼굴과 오버랩되어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놓아 울음을 터뜨렸다. 풍상세월을 살아오면서 그렇게 큰소리로 울어보기는 아마도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최씨는 이승에서의 삶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조용히 다음 세상을 향하여 우리곁을 떠나갔다. 나와는 혈연관계는 없었지만 세대를 뛰어 넘어 어쩜 그 보다도 더 소중하고 끈끈한 인연을 이어갔던 것처럼, 내세에서도 꼭 다시 만날 것을 절망과 두려움에 가뭇거리는 그의 눈빛을 보며 간절히 기도했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성선설을 구태여 거론하지 않더라도 본래의 착한 심성으로 회귀하고 마지막 가는 길에는 평소 보고 싶었던 지인, 생전에 은혜를 입었거나 각별한 교분을 쌓았던 사람들을 찾는다는데 여러모로 부족한 내가 과연 최씨에게 그럴만한 사람으로 기억 될 만큼 인간으로서의 참된 도리를 다 하는 삶을 살아 왔는지 나 자신에게 되묻고 싶은 심정이다. 아울러 나 자신 임종시 가족 이외에 서로를 피붙이로 여기며 뜨거운 석별의 정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를 곰곰 생각하게 하는 오늘이다.

  이제 며칠 있으면 그의 기일이다.

  산자와 죽은자의 만남은 결코 낯설거나 멀거나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걸 세삼 느끼게 된다.

  이승에 머무르는 그 순간까지 후회없는 삶을 보내다 행복하고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이른바 웰 다잉 공부를 우리 다 같이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하는것이 현명한 인생살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출처 : choigoya
글쓴이 : 최고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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