草 岩· 나 상국 詩人님

[스크랩] 임연규 시인님의 시

° 키키 ♤ 2012. 6. 22. 23:47

주저 물러 앉았다

                          임연규

 

고향가는

서낭고갯마루

김씨가 살던

외딴 집

두레박 샘을

낮달이 들여다보고

끝내

집이

주저 물러 앉았다

그도

기다림에 지쳤을 것이다.

 

아버지   - 임연규 -



내 니 맘 다 안다

글을 쓰던 밥을 하든

남의 담 넘겨다보지 말고

때 되면 네 집 굴뚝에 연기 올려라

나는 한평생 농사꾼으로 팔순이 넘었다

너는 명색 시인이라면 알기라

詩 한편이 농사라면

나는 콩 한포기가 한해 농사였니라

콩 심은 데 콩 나는 기라

시인이면 시나 써라

누가 너를 알아주길 바라지 마라

세상 많은 사람 알고 살 필요가 있느냐

꽃이 향기로우면 저절로 나비가 찾아오지 않느냐

너를 위해서

詩를 써라

 

파도

 

아내는 잠든

 

아들녀석 귀청을 파 주며

 

파도 소리를 넓혀주고

 

나는 뭍에서 따라온 시름

 

잊으라 잊으라

 

파도 소리는 내 귀를 막아주네

 

월악산 내려오는 길에

중년의 여인이 턱숨을 몰아쉬며

대책 없이 묻네


"아직 멀었나유"

 "글쎄요, 어디를 말입니까"

 "마애불이나 영봉까지요"


"마애불은 부처님께 가는 길이니 나도 헤매고
영봉은 하늘에 이르는 길이니 더더욱 아득하겠지요"
                                             임연규의 시 "下山길" 온 마디

 

구름을 닦다

임연규

 

 

 

 

 

하얀 걸레로 창문에 낀 먼지를 닦았다

하늘에 구름이 없어졌다

내 손에 든 걸레를 펴니

묻어난 먼지가 구름으로 펼쳐졌다

무시로 내 방을 찾아 왔을 구름.

하늘의 구름은 우리도 모르게

먼지로 백토 되어

창문에 와서 생을 마치는 것일까?

오늘은 하늘이 맑다.

 

 

임연규/ 1995년《시와산문》 조병화 박희진 추천으로 등단. 시집 『제비는 산으로 깃들지 않는다』

                                      『꽃을 보고 가시게』 『산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현 중원문학 회장.

 

연인 / 임연규

이제 당신을 따라 갑니다
당신은 사진작가입니다

봄이면 꽃으로 오고
여름에는 비가 되어 옵니다
가을에는 단풍이 되어 오고
겨울에는 흰눈이 되어 옵니다

산에 가면 나무가 되고
들에 가면 들꽃이 됩니다

산문에 들면 풍경소리에 귀 열고
성당엘 가면 두 손 모은 마리아가 됩니다

당신의 렌즈속에는
無言의 진실만 있음을 봅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에 눈을 맞추고 있습니까.

 

나무가 애 뵀다

 임연규





미국에 있는 박사 친구에게 물었다



우리가 해 저물어 겉바람 같이 휘둘러 나온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말이다



그 기둥이 배흘림기둥이라 하는 데



미국말로 '배흘림기둥'을 뭐라고 하나?



"......"



"나무가 애 뱄다 아니가……."

 

네 잎 클로버

헌 책방에서 고서를 뒤적이는데
우연히 펼쳐지는 책갈피에 빛바랜
네 잎 클로버



누군가 고이 간직한
숨겨진 행운을 잊은 것일까
나를 놓지 않고 따르는 그림자처럼

 

 

 

고명을 놓으며 / 임연규

 

 

 

어느 날 막 비질을 끝낸 산사에 시월의 가을볕이 깔끔하고

 

가을산은 단청불사가 한창으로 대웅전 마당에까지 붉은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큰 절 퇴설당 마루에 한가로운 오후

 

仙筆의 노스님이 '산'을 휘갈겨 쓴 글씨에 획 하나가 슬쩍 생략되어

 

'신'이 돼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입가에 묘한 환희심이 일었다

 

산 과 신... 산과 신은 무엇의 공존일까

 

지구상 신을 찾는 존재는 산 아래 사람 뿐이니

 

사람의 존재가 곧 신 아닌가?

 

석가모니도 예수도 공자도

 

우리도

 

사람으로 와서 산 같이 살며 획 하나 슬그머니 빠져 나가듯 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가!

출처 : 자 연 사 랑
글쓴이 : 나상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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