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야· 최영록 詩人님

[스크랩] 목포 째보선창

° 키키 ♤ 2012. 11. 6. 02:20

 

1960년대의 째보선창, 선창위 굴뚝은 조선내화 공장이다.(출처:목포제일중 22회 동창회)

 

 


목포 대반동 째보선창 뒤 켠

바다를 목숨처럼 끌어안고

깡다리젓 밴댕이젓 송어젓 육젓 파는

붙박이 언챙이 뻘둥할매

굵은 철사 동여 맨 항아리 속에는 지금

마파람이 아우성이다


어쩌자고 먹어줄 사람 하나 없는

저들만의 잔칫상을 차리는 것일까

테 맨 항아리 수북이 움트는 소금꽃 위로

갯바람 버무린 주름살이 덩달아 피어난다


소금 맺힌 할매 등짝 짓누르는 햇살

계절의 절반은 언뜻언뜻 갯살이 따뜻하고

뒤로 오는 사람의 절반은 그림자가 차갑다

젓갈보다 짭짤하게 뒤엉킨 삶의 건더기들

펼쳐진 방파제를 타고 꿈틀꿈틀 기어나간다


갯골 뻘밭 발반죽하는 사람도 없는데

할매가 옮겨 담은 간간하게 젖은 꿈들

손쇠스랑 젓갈 긁는 금속성만

바다 광야를 쟁기질한다

-최영록<째보선창 할매별곡>

 

 

목포에 째보선창이 있었다. '째보선창'이라는 말이 특이해 자료를 뒤적였다. 째보는 '언청이'를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다. 언청이는 선천적으로 윗입술이 세로로 찟어진 사람이나 그렇게 찟어진 입술을 말한다. 선창(船艙)은 물가에 다리처럼 만들어 배가 닿을 수 있게 한 장소를 말한다. 그러니까 째보선창은 선창이 째보같이 생겨서 붙여진 명칭이다.

 

인테넷을 검색하면 째보선창이 두 곳이 있다. 목포와 군산이다. 군산의 째보선창 안내판에는, 조선조 숙종 27년에 만들어진 전라우도 군산진 지도를 보면 죽성리(현 죽성동)의 서쪽 낮은 산 아래로 흐르는 강을 말한다. 둔율, 송창, 개복에 서있는 야산에서 모아진 물이 큰 내를 이루고 째보선창으로 흘렀다 한다. 째보선창이란 말은 첫째, 지리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금강의 줄기가 백마강쪽으로 뻗어나가다 살짝 옆으로 째져서 흐르고 있는데 이곳에 선창이 있었으므로 '째보선창'이라 전해지고. 둘째로는 옛날 이곳에 째보(언청이)라는 힘센 사람이 있었는데 외지에서 이곳을 들르게 되면 이 째보에게 지금으로 말해 자릿세, 또는 텃세를 상납했다고 한다. 따라서 째보가 있는 선창이라 하여 '째보선창'이라고 하는 일설도 있다고 한다.

 

군산 째보선창은 채만식의 소설《탁류》에도 등장한다고 한다. "남도에는 목포가 있고, 북도에는 군산이 있다. 목포에는 이난영이 있고, 군산에는 채만식이 있다. 목포와 군산의 공통점은 둘 다 일제의 경제적 침탈기지로 흥성했던 곳이고, 그 구실이 끝나면서 이후 끝없는 정체를 거듭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르다면 목포가 풍류적인 냄새가 강한 곳이라면 군산은 한결 상업적인 성격이 강하게 느껴진다는 정도일까. 이제 서해안 시대가 열렸다고는 하나 1980년대 이후 상업항 기능은 거의 상실하고 근대화의 잔영처럼 남아 있던 군산의 미래가 그렇게 밝기만 할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어쨌거나 아직까지 일제시대 건물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거리를 지나 부둣가로 나간다. "째보 선창". 소설 〈탁류〉의 주무대가 되었던 곳이다."(유성문<강경에서 선유도까지>)

 

이제 우리 목포의 째보성찬을 알아보자.《목포의 땅이름》에 보면 "다순구미를 매립하면서 제방을 곧 바로 쌓지 않고 ㄷ자형으로 꺽어 넣어서 어선 정박처를 만들었는데 바닷가안벽이 언청이처럼 안쪽으로 들어갔다 하여 째보선창이라 하였다. 이 째보선창은 1981년 제10회 전국소년체전이 광주와 목포에서 열렸는데 유달산 일주도로를 확장 정비하면서 일직선으로 매립하여 목포의 명물 째보선창도 없어졌다."고 한다. '다순구미' 온금동의 옛 지명이다.

 

째보산창은 언제 조성됐을까. 《목포의 땅이름》<목포 시가지의 형성>에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의 목포부) 일본인의 급증은 조계지역 외로의 시가지 확대를 초래하였고 특히 항만과 연계된 광주 목포간의 일등도로(국도 일호선)의 개통, 호남선 철도 개통(1914)의 영향으로 서산동 지역이 개발되어 죽동에 있던 유곽이 櫻町(앵정, 금화동)으로 옮겼고 온금동의 어항(째보선창)의 축조와 남교동(수문통 거리)의 매립으로 시가지가 확장 개발되었다"고 적었다.

 

째보선창의 조성 시기를《목포의 땅이름》에서는 1914년 경으로 봤는데,《근대도시 목포의 역사 공간 문화》에서는 <每日申報>(1912.8.2)기사를 인용해 "온금동 어항(漁港)의 개착도 주요산업의 하나였다. 1912년에는 온금동 움푹 들어간 부분에 있는 간석지 전부를 매축하여 해벽공사를 한 다음, 그 중앙에 폭 30칸, 깊이 15칸, 연장 70칸을 개착하여 어항의 출입과 정박을 편하게 하고 개착한 대거(大渠)의 좌우로 도로를 종횡으로 내고, 택지 만여 평을 일용잡화 및 기타 필수품점 자리로 채우기 위해 차가(借家)를 세웠다. 공비는 약 6만 원에 달하였다고 한다."고 말했다. 당시 개항장 목포는 인구증가와 교역의 확대에 따른 부지와 부두공사가 꾸준이 지속됐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목포 째보선창' 그러나 째보선창에 깃든 추억은 향수의 다름 아니었다. 윤소하는 <목포를 느끼세요>에서 "  목포를 느끼세요/힘든 일상, 노동의 끝자락, 잠시 시간을 내어 목포를 살피세요/내가 살고 있는, 내 이웃이 살아가는 목포를 품으세요.//가끔 시간을 냅니다/북항, 어민동산, 해양대, 대반동/그리고 사라져 버린 째보선창 언저리를 가만가만 뒤적여 봅니다.//새벽녘 꿈자리 뒤 끝을 더듬 듯 가다가 쉬고/달리다 멈추어 발걸음을 놓습니다/흉물처럼 자리한 조선내화 뒤 언덕배기/다순구미라는 온금동 골목을 걸어보십시오"(후략)고 노래했다. 김훈의 문학기행 <암태도>(창작과 비평, 1979)에도 째보선창 얘기가 나온다. "암태도 농민들은 붙잡혀 간 소작인회 간부 농민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 위하여, 또는 일본인 행정당국자와 담판을 벌이기 위하여, 이 남일환을 모선으로 삼아 그 둘레에 7, 8척의 돛단배를 거느리고 3, 4명씩 무리를 지어서 목포의 째보선창으로 건너왔다."《암태도》는 송기숙의 소살로 1923년 신안 암태도 소작쟁의를 소설화한 작품이다.

 

출처 : 無人山房
글쓴이 : 南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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