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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강화. 진도. 제주, 삼별초의 숨결 따라

° 키키 ♤ 2012. 9. 17. 13:40

불편드려 죄송합니다.

추억나무가 현지 리포트를 한 뒤 네이버에 혁사의 현장으로 올렸습니다만

불행하게도 원본을 찾지 못해 아래를 클릭해 주셔야겠습니다.

비록 길이는 5분에 불과하지만,

중국과 일본의 위협 속에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될 감명깊은 영상입니다.

 

복사 http://blog.naver.com/digitalbiz/20131431941

 

 

 

 

 

4년 여, 줄기차게 대몽항쟁 전개한 '삼별초'의 최후

1270년 개경 환도가 임박하자 삼별초는 몽골과 결탁한 왕에게 운명을 맡길 수 없었고, 내부에서 동요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원종은 삼별초에게 해산령을 내리고 그들의 명단을 거둬오도록 지시하였다.

연명부가 몽골군의 수중에 넘어가면 삼별초는 전멸이었다.

1270년 음력 6월 초, 개경 환도를 앞둔 시점에서 삼별초의 지도자였던 배중손노영희 등 삼별초 지휘자들은 항전을 결정한다.

삼별초는 왕족 승화후 왕온을 추대하여 황제로 삼고, 대 선단을 이끌고 진도로 도착했다. 당시 진도와 그 인근 지역에는 과거 최씨 정권이 소유한 농장이 그때까지도 존재하였으며, 대규모 몰려 있었다. 동시에 경상도전라도 지방의 세곡이 서울로 운송되는 길목에 진도가 속해 있었다. 이는 세곡으로 운반되는 식량과 자금을 빼앗아 자체 군량으로 쓰는 동시에 개경 정부를 압박할수 있는 요충지였다.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는 '용장사'라는 절을 임시 황궁으로 삼았다. 그리고 용장사 주변에 산성을 쌓고 관아도 세웠으며 제법 도읍지의 면모를 갖추고 그들은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조정의 진압군은 속수무책이었고 삼별초의 위세는 진도 주변의 나주· 장흥에서 마산·김해·부산 등까지 남해안 일대를 석권하고 해상제국을 건설한다.

그들은 또 고려의 정통 정부임을 자처하면서 일본에 사절을 교환하는 등의 외교활동도 하였다. 1270년 음력 11월 이르러 삼별초군은 제주도까지 점령하였다.

1271년 음력 5월 · 연합군이 조직되어 세 방향으로 나눠서 진도를 공격해왔다. 삼별초는 진도의 관문이었던 벽파진에서 중군을 막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삼별초가 중군으로 들어오는 적을 막는 데 주력하는 동안, 그 틈을 타서 여몽 연합군의 좌군과 우군이 배후와 측면에서 기습 공격을 해왔고, 성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지휘자 배중손과 승화후 온은 살해되고 혼란에 빠진 삼별초는 피신하였다.

살아남은 삼별초 병사들은 김통정의 지휘 아래 혼란을 수습하고 제주도로 후퇴한다. 그 후 제주도에서 항거하며 일진일퇴가 거듭되었으나 1273년 음력 4월, 여·몽 연합군 1만여 명이 당도했다. 끝까지 버티던 제주 삼별초는 힘없이 무너졌다. 지휘자 김통정은 산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4년여에 걸친 삼별초의 항전은 막을 내린다.

<출처:'다음'백과사전>

출처 :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글쓴이 : 추억나무의 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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