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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삶의 향기] 저 낡은 치마

° 키키 ♤ 2013. 6. 18. 02:39

[삶의 향기] 저 낡은 치마

 

        김서령           오래된 이야기 연구소 대표

30년 전 치마를 요즘도 입는다. 그냥 입는 정도가 아니라 입을 게 마땅찮을 때마다 절로

 그리 손이 간다. 예쁜 옷이어서가 아니다. 그때보다 허리가 굵어지고 엉덩이도 살쪘으니 몸에 잘 맞다고 할 수도 없다. 실크나 울 같은 고급 옷감도 아니다. 그랬다면 진작 좀이

 슬거나 오그라져 폐기처분 됐을 것이다.

 그런데도 줄기차게 이 옷을 입는 이유? 인간사가 다 그렇듯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다. 어제도 저 치마를 입고 택시에 앉아 가만히 옷을 들여다봤다. 넌 무슨 인연으로 지치지도 않고 내 몸을 감싸고 있는 거니? 옷도 한 30년 곁에 두면 예사 아닌 인연이 생긴다.

 

 난 물론 이 치마의 어두운 체크를 좋아하지만 무늬만으로 옷 하나를 30년씩이나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뻣뻣하다고 할 만한 질감이 이 치마를 오래 버티게 한 이유였나? 고운 피부결의 여자들이 쉬 주름이 생기듯 섬유도 너무 결이 고우면 금방 흠이 나버린다. 까다로운 성질이 불편해 자주 입을 수도 없게 된다.

 옷장 속에 들어 앉혀둔다고 옷을 대접하는 게 아니다.

 엔진이 있는 기계처럼 집이나 옷도 사람 체온이 자주 닿아야만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이 치마는 처음 몸에 걸친 후 10년이 넘어서야 비로소 옷장에서 튕그러지지 않을 줄

알게 됐다. 이런 뻣뻣한 섬유가 원래부터 고급 옷일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싸구려 옷이란 얘기는 아니다. 값싼 제품이었다면 치마걸이에 끼워 옷장 중앙에 걸어두는 수고를 계속했을 리가 없다.

 1982년 가을에 저 치마를 2만원쯤 주고 샀던 것 같다. 갓 졸업한 내 월급이 20만원이

 채 못됐으니 만만한 가격은 아니었다.

 거리 양쪽에 옷가게와 구두가게가 빽빽하던 대구 동성로 어딘가에서 나는 저 치마를

 발견하고 멈춰 섰었다. 자그만 가게의 윈도에 걸려 있던 치마였다.

어두운 체크, 주름 많이 잡힌 풍성한 플레어, 종아리를 가리는 기장이 다 마음에 들었다.

 가게 이름은 잊히지도 않는 컬리지 스트리트! 아니 지금도 치맛단에 명백하게 붙어있는

 라벨이 그 이름을 증언한다.

 컬리지 스트리트 곁엔 움베르토 세베리란 옷가게가 또 있었다.

 당시 나는 혀가 꼬일 듯한 그런 브랜드 이름들을 우리 안의 사대주의라고 미워했지만

 분노와 구매는 편리하게도 별개의 일이었으니!

 이 치마를 입는 30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내 곁을 스쳐갔다.

 치마처럼 한결같은 관계, 거리, 가게, 집, 심지어 브랜드조차도 거의 찾을 수가 없게 됐다. 그간 변화와 혁신만이 살길이라고 외치는 세상 속에 살아왔다. 다들 새것, 큰 것, 번쩍이는 것만을 좇아서 달려왔다.

그런데 이제 나는 오래 묵혀 낡고 헌것들 속에 진짜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이 됐다.

 
 저 치마를 샀던 20대에 나는 가치가 뭔지 잘 몰랐다. 저 치마를 걸친 채 그게 뭔지를

 더듬더듬 짚어온 것 같다. 최근의 나는 적어도 삶의 우선순위를 정할 줄은 알게 됐다.

날뛰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방법도 어지간히는 터득했다고 할 수 있다.

저 치마는 내 몸을 감싼 채 그 기승전결과 생로병사를 물끄러미 지켜봐 왔다.

낡은 치마를 못 버리는 이유가 이거였나? 동지애? 미운 정? 과거 집착? 문명비판?

 진회색과 파랑이 섞인, 정장도 캐주얼도 아닌, 유행에 상관없는 덤덤한 치마가

 지금 여기 있다. 이 덤덤함이야말로 이 옷이 내 곁에서 30년을 버텨온 힘이었을 거다.

 공자의 중용이나 노자의 도(道)도 이런 언저리에 있는 게 아닐까.

 

 확실한 건 당시 흔하던 ‘반도패션’이나 ‘논노패션’ 같은 번듯한 정장이었다면 저 치마는

 진작 내 곁을 떠났을 거라는 거다. 세월이 덧입혀지면 물건도 피붙이 같은 것이 되고

 괄목상대할 동지가 된다.

 옷핀을 입에 물고 옛날 엄마가 속치마 앞섶을 잠그듯 작아진 치마허리를 잠글 때 나는

청춘의 길이를 상쾌하게 정의해낼 수 있다.

 그건 헐렁하던 치마허리가 꽉 끼이는 시간, 특수가공 폴리에스테르 치마에서 풀기가

 빠져나가는 시간, 딱 그만큼의 길이 였다.

김서령 오래된 이야기 연구소 대표

 ◆필자는 경북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오래된 이야기 연구소 대표를 맡고 있는

 칼럼니스트다.

                                 입력 2012.07.05

출처 : 조 헌 섭
글쓴이 : 조헌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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