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 말씀

[스크랩] 보이지 않는 조선의 마음 ??-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문

° 키키 ♤ 2012. 7. 5. 00:17



보이지 않는 조선의 마음
          
-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문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이곳 조선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이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 자체가 기적입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그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를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할 일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으로 볼수 있는 날이 있을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수 있게 될것을 분명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신 이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자녀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이곳 모든 사람들로 부터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 아멘



개신교를 대표할수 있는 정식 선교사의 입국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입국한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젤러 선교사라고 평가할수 있다



(1) 출생 및 유년기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는
1859년 7월 19일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아버지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그랜트 마리(Elizabeth Grant Marie)
사이에서 6남매 중 넷째로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목회자는 아니었지만 종교적인 관심이 많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일생을 마친 인물이었고
그의 증조부인 토마스 언더우드 역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또한 토마스의 아내는 스코틀랜드 출신인
알렉산더 와우 박사(Dr. Alexander Waugh)의 딸인데
박사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기독교계에
큰 영향을 끼친 분으로서 능력 있는 설교자였으며
해외선교에도 깊은 관심을 지닌 분이었다

언더우드와 알렉산더 와우 박사 사이에는
모종의 유사성이 있는데
관대한 마음과 씀씀이 넓은 박애심
그리고 연합에의 사랑 자비 지도 및
조직의 자질 지적인 은사 등을 들수 있다

언더우드는 이런 신앙의 계보를 가진 가정에서
신앙적 유산을 받아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로 부터는

주의 재림에 대한 갈망과 기다림을  완전히 물려받았다
해서 주의 재림은 언더우드에게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되었으며
자신의 시대에 영광된 재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것을 멈춘 적이 없었다

이것은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언더우드가 다섯 살 되던 해 다섯 명의 자녀를 남기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언더우드의 아버지는 몇년 후 재혼했다

자녀들에 대한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는 자녀들의 장래를 생각해
10살 된 호레이스 언더우드를
12살 먹은 형 프레드 언더우드(Fred Underwood)와 함께
프랑스의 불로뉴 슈메르(Boulogne Sur Mer) 지방에 있는
가톨릭이 운영하는 기숙사 남학교에 보냈다

가톨릭계 학교라 해서
소년들을 개종시키려 하는 일은 없었으므로
소년들은 영국인 교회에 출석하면서 흔들림 없이
개신교 신앙을 지켜나갔다

그곳에는 영국 학생들이 있기는 했으나
주로 프랑스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두 형제는 기숙사에 들어오자 언제나처럼
옷을 벗고 무릎을 꿇고 조용히 기도했다

당시 세속화되어가던 가톨릭계 학교에서 볼수 없었던
낯선 이 모습을 보던 프랑스 소년들은
베개 장화 빗 등을 던지며 조소했지만
두 형제는 굴하지 않고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

이에 처음에는 방관하던 영국 소년들이
며칠이 지나지 않아 두 형제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고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프랑스 소년들도 저들과 함께 기도하기 시작하여
취침하기 전 기도하는 습관이 기숙사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어릴 때 언더우드에게는 독특한 습관이 있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다른 일은 모두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런 집중력 때문에
언더우드는 한번 하고자 결심한 일은
그 일이 어떤 성격의 일이든
또 아무리 어려운 난관에 부딪힌다 해도
그것을 뚫고 나가
결국 거의 모든 일들을 성공적으로 끝내곤 했다



(2) 미국에서의 청소년기

1872년 언더우드가 12살 되던 때에
부친은 그의 가족을 데리고 영국을 떠나
뉴저지주의 뉴더햄(New Durham)에 정착했다

갑작스런 사업 실패로 가산이 기울자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것이다

언더우드가 화란개혁교회에 적을 두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후에 언더우드가 보여 준 타 교단에 대한 관용과
신학적인 유연성과 동료들과의 친화와
부흥운동에 대한 열정이
모두는 화란개혁교회에서 물려받은 유산들이었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주일 오후의 대부분을 자녀들과 함께 보냈다

아버지가 무슨 일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
성경을 읽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수 없는 주일에는
아이들은 교회 놀이를 하곤 했는데
이런 경우에 호러스는 언제나 설교자 역을 맡았다

그는 의자 위에 올라서서
정식 예배와 똑같이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청중과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설교를 하곤 하였다

프레드는 가장 성자답다는 명성을 얻고 있었고
존은 장남으로서 가장 큰 권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이 둘 중 한 사람이 설교를 담당하는 것이
제격일수도 있었는데
설교자의 역할은 언제나 호러스가 맡곤 했다

훗날 실제로 설교단에 서서
청중들을 사로잡아 감동시켰던 그 재능
그리고 한국의 이야기를 그렇게 힘차게 설파했던
그 재능의 상당 부분이
이 당시에 이미 발견되고 발전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역할이 호러스에게 맡겨졌던 것이 아닐까싶다

미국에서의 소년 시절 동안
소년들은 많은 복음사업에 관여하였다
교회와 주일학교에서의 서너 번의 정규 예배 외에도
이들은 선교학교에 참여하였으며
유니온 힐(Union Hill)의 암흑가에
종교서적을 배포하는 일에도 관여하였다

한 번은 술집에서 전도하던 중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거기 있던 사람들이 그들에게 나가라고
거칠게 소리친 적이 있었다

소년들은 예의바르게 절을 하고 물러났지만
난폭한 행동과 하나님을 모욕하는 소리에도 흔들리지 않고
다음 주에 침착하게 다시 방문하였다

소년들은 경찰을 부르겠다는 협박을 받았으나
열 살 때에도 그 소란스러웠던 기숙사에서
기도할 수 있었던 이들인지라
이제 열여섯 열일곱이 된 나이에
한두 명의 문지기가 저지한다고 해서 단념할리가 없었다

결국 술집 사람들은 옛날의 프랑스 학생들처럼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에 굴복하였고
이 상냥하면서도 동시에 불굴의 의지를 지닌
어린 복음전파자들과 친해지기까지 하였다

이 시절에 호러스는 좋은 지도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그로브 교회에서 봉사하던 메이번 목사(Rev. Mabon)였다

호러스는 그의 밑에서 자라면서
대학에 진학할 준비를 하게되었고
학자처럼 탐구하는 자세로 책에 몰두하여
여섯 달이 지나자
대학에 진학하는 데 필요한 헬라어를 모두 배우게 되었다

메이번 목사는
호러스가 브룬스윅에 있는 화란 개혁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 신학교에서 조직신학과 학과장직을 맡고 있었다



(3) 청년기
이민 후 자기의 본업인 문방구 제조에 착수하여
성공한 아버지는
언더우드를 장차 목회자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1877년 뉴욕대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다시 가세가 기울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기숙사에서 생활할수 없었던 언더우드는
20여 리나 되는 거리를 매일 걸어서 통학하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한 번도 자신의 형편을 불평한적이 없었다

대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졸업시 졸업반을 대표하여
고별연설을 할 정도로 우수한 성적으로 뉴욕대학교를
졸업한 언더우드는 부친이 세상을 떠나는 슬픔 속에서도
신학교로의 입학을 포기할수 없었다

1881년 자신이 속한 교단 신학교인
뉴 브룬스윅(New Brunswick)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에 입학했다

(the Dutch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1784년에 설립된 화란개혁교회(RCA) 교단 신학교
뉴 브룬스윅신학교는
비록 외형적으로는 프린스톤신학교와 견줄수 없었지만
그리피스를 비롯한 수많은 목회자 선교사 학자를
배출한 훌륭한 신학교였다

호러스는 이목구비가 단정한 외모에 성실, 헌신, 영성,
그리고 지성이 하나로 어우러져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게다가 남다른 복음의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언더우드는 신학교 은사들의 인상에 깊게 남은
남다른 학생이 되었다

호러스가 신학교에 입학할 때
그를 관찰했던 어떤 사람은 이렇게 썼다

그를 처음 본 순간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하리라
그는 수업이 시작되는 첫날
뉴 부룬스윅의 신학교로 가는 길을 걷고 있었는데
나는 어떤 이에게 그가 누구인가를 물어보았다

그를 처음 보았는데도
그의 얼굴에 나타난 어떤 목적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집념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하였다

호러스는 말씀 연구와 신학공부
그리고 학비를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로
하루 5시간만 자는 고된 일과를 감당했다

한가지 일을 시작하면 끝장을 내고 마는 성격 탓에
그는 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동안에도
건강은 염려하지 않고 학업과 복음 사역에 전념하는

열성을 보였다

호러스가 신학교에 다니던 3년 동안
거의 매일 그가 무슨 종교적인 일로
뉴 브룬스윅의 어떤
거리를 외투자락을 휘날리며
뛰어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급우중 한 사람은 이야기 하곤 했다

이러한 활동이 학업에 지장을 주리라고 믿는 교수들은
그것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러스의 활동을 저지할수는 없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고
또 그가 하는 행동들이 학급에서
그가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데 영향을 미치거나
5시간의 수면과 19시간의 학업과 일을
강철과 같이 견뎌내는 그의 몸에도
무리를 가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에
교수들은 실제로 그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할수 없었다

그 당시 뉴 브룬스윅의
가장 큰 화란 개혁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이스튼 박사는 호러스와 마음이 통하는 인물이었다.

영혼에 대한 정열로 불타오르던 그 목사는
이전에는 변화가 없고 냉랭했던 교회에 불을 질렀다

계속적인 부흥 놀라운 회심들 새벽기도와 저녁기도
예배 후의 모임 등으로 넘쳐나게 된 이 교회는
모든 이웃 교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 과정 속에서 호러스는 부목사가 감당해야 할 만한
역할을 감당해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주일 하루 내내
일곱 여덟 번의 예배에 참석하면서 열정적인 활동을 감당했다



언더우드의 한국선교 준비

언더우드가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네살 때였다
언더우드는 인도에서 온 어떤 사람의 설교를 듣고
선교사가 될 결심을 했었는데
선교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자
이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는 의학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오지의 선교부에서 일할 충분한 준비를 갖추는데
필요할지 모르기 때문에 의학도 공부할 계획을 세웠다

뉴욕대학교에서의 4년
그리고 뉴 브룬스윅신학교에서 3년간
그가 경험한 배고픔과 어려움 고학과 면학 근면과 성실은
후에 목회자로서 선교사로서의 성공을 위한 토대를 다지는
중요한 훈련과정이었다

언더우드가 한국에 관해 처음 접한 것은
신학교 2학년 때인 1882-1883년 겨울이었다

 

그의 급우 가운데 한 사람인
앨버트 올트먼스(Albert Oltmans)가
뉴 브룬스윅신학교 선교지원자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한국과 미국 사이에 한미조약이 체결되었지만
1,200만 내지 1,300만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살고 있어
이곳에 복음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을 때였다

한국에 대한 선교를 촉구한 또 하나의 계기는
한국에 대한 윌리엄 그리피스의 도전을 통해서였다

1882년 언더우드의 뉴 브룬스윅신학교 10년 선배인
그리피스는
그 유명한

조선 : 은둔의 나라 (Corea: The Hermit Nation) 를 출판해
한국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방대한 자료의 섭렵과 예리한 필치가 조화를 이룬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당시로서는 한국에 관한
가장 무게 있는 서적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었고
달레의 한국교회사나 로스의 한국의 역사
고대와 근대 (History of Corea, Ancient and Modern)와
더불어 한국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서적으로 자리 매김 했다

한국에 관한 역사 문화 사회는 물론
한국의 대 외국교류관계
그리고 선교 전망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주제를 일목요연하게
그러면서도 국제 정세와 선교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기술했다

당시 세계무대의 뒤안에 가리어져 있던
은둔의 나라 한국을 역사의 장으로 끌어낸 작품이었다

또한 신학교에서 마지막 3학년을 보내던
1883년과 1884년 사이
뉴 브룬스윅신학교 학생들 앞에서 행한
복음주의운동의 대변자 피어선(A. T. Pierson)의 강연은
언더우드에게 많은 유익이 되었다

뉴 브룬스윅에 재학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점점 더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미 인도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고
오랫동안 준비한 터였기 때문에
선교지를 한국으로 바꾸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많은 난관과 어려움들을 통과해야만 했다

신학교의 마지막 학년인 1883년의 여름 동안
언더우드는 뉴저지주 폼프돈의 한 교회를 담임하였다

그는 선교의 명분을 강조하여
줄기차게 선교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에
당회는 만일 외국 선교지에 너무 많은 돈을 내어 놓는다면
그의 보수도 지급할수 없을지 모른다고 경고하였다

그는 걱정마십시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는 보수를 받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라고 답했고
이렇게 되어
선교에 할당되는 예산은 엄청나게 증가하였고(4배)
그도 목회를 마칠 무렵에는
두 배의 보수를 받을수 있게 되었다

그는 1884년 봄에 신학교를 졸업했고
1884년 11월에는 뉴브룬스윅 노회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즈음 그는 비록 인도에 가기로 결정은 했지만
한국과 한국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오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선교본부에 올린
선교 제25주년 기념식 연설(문)에서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882년과 1883년에 걸치는 겨울
지금은 토쿄의 명치학원에 계시지만
그 당시에는 학생이었던 엘트먼 목사(Rev. Dr. Altman)가
뉴 브룬스윅의 선교 지원자들을 모아 놓고
한 보고서를 읽어주었습니다

그 보고서는 조약에 의해
서양 세계에 마침내 문호를 개방하게 된
은둔의 나라에 관한 것으로
그분이 직접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천이백만 내지 천삼백만의 사람들이
복음 없이 살고 있다는 것
교회가 문호개방을 위해 기도했고
결국 1882년 슈펠트 제독을 통해 맺은 조약에 의해
미국에 문호가 개방되었다는 간단한 이야기를 듣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선교를 위한
아무런 준비활동도 없이
일 년여를 보냈다는 생각 때문에
저는 한국에 갈 사람을 찾는 일에 착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저 자신은 인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고 있었고
이런 신념하에 그곳에 갈 특별한 준비를 하기 위해
일년 동안 의학 공부를 해온 터였습니다

때문에 저는 누군가 기꺼이
한국에 갈 사람이 달리 있으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능한 한
서둘러 한국에 갈 사람을 물색해보았지만
한 사람도 발견하지 못한채 일 년이 흐르고 말았습니다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려는 교회는 한 군데도 없었으며
외국 선교 사업의 지도자들도 한국에 들어가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하는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왜 너 자신이 가지 않느냐?
이런 메시지가 제 가슴에 울려온 것은
바로 이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도가 필요로 하는 것
인도에의 특별한 부르심에 대한 저의 믿음
그리고 그 소명을 위해 각별히 준비해 오던 일들이 떠올라

제가 한국으로 가고자 하는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저는 개혁교회 선교부(The Reformed Board)에
두 차례나 신청을 했으나
그들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자금이 없다고 했습니다

또 장로교에도 두 번 신청했으나
소용없는 일이라는 답변을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한국으로 가는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미국에 남아있거나 인도로 가는 문은 넓게 열려 있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혁교회의 요청을 수락하는 서신을 써서
그것을 막 우체통에 넣으려는 찰나
어떤 목소리를 들은 듯했습니다
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그래서 언더우드는 서신을 보내는 것을 일단 보류하고
재차 장로교 선교부에 신청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갈 때
막 문을 나서는 우체부를 지나쳤다
엘린우드 박사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박사는 방금 편지 한 통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것은 선교부가 원래 파송하려 했던 사람이
사정상 갈수 없게 되어
언더우드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수일 내에 임명을받게 될 것을 알리는 편지였다

이 무렵 브루클린(Brooklyn)의
라파예트 장로교회의 맥윌리엄(Mr. McWilliam)씨는
미국 선교부의 위원 한 사람이 한국의 문호는
아직 개방된 것이 아니라고 쓴 글을 읽고
엘린우드 박사에게 한국의 상황을 문의하였고
엘린우드 박사는 맥윌리엄에게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때가 무르익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맥윌리엄은
한국 선교 사업을 시작하는데 써 달라고
그 자리에서 6천 달러짜리 수표를 끊어주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따라
한국 선교를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미지의 나라였다
해서 언더우드의 형제들은
만일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저 어두운 지역으로 꼭 가야 하겠다면
최소한 영국에 가서 그곳에 살고 있는 친척들에게
작별 인사는 해야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1884년 여름 언더우드는 대서양을 건너
삼촌 숙모 사촌들을 짧은 기간 동안 방문하였다

언더우드는
런던 선교회(The London Missionary Society)의
총무직을 맡고 있던 삼촌인
에드워드 존스 목사(Rev. Edward Jones)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거의 20년 전에
우리도 그곳으로 한 사람을 보냈는데
그 후론 소식을 못 들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그런 끔찍한 이야기에도 결코 낙심하거나
한국 선교를 포기할수 없었다

북장로교 선교사로 임명을 받은 언더우드는
188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
한 달 후인 1885년 1월 25일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언더우드는 자신이
많은 돈을 가지고 떠난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손수 커다란 카메라와 타자기
그리고 가방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짐의 화물비가 너무 비쌌기 때문에
가지고 있던 현금을 거의 다 써버렸다

그나마 남아 있던 돈도
샌프란시스코에서 호텔 비용으로 다 나가버렸기 때문에
요코하마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빈털터리 상태였다

언더우드는 하나같이 한국선교를 염원하고 후원하던
헵번(J. C. Hepburn)을 비롯
그곳의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의 환영을 받았다

동양에서는 어디서든 선교사끼리 만나면
그들은 곧 형제를 만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 사람의집, 지갑, 시간, 등 모든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돈 문제에 관한 한 선교사 신임장을 갖고 있기만 하면
누구든 얼마만큼의 돈이라도 빌려주는 것이 통례였다

그 이유는
첫째로
선교사는 그 돈을 갚아줄수 있는
미국의 커다란 선교부의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선교사들은 오래된 동양의 전통에 따라
그들의 정직함에 대해서는 아무도 뒤흔들수 없는
확고한 명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더우드는
돈 문제에 관해서는 걱정이 없게 되었다

한국과 같이 외떨어진 곳에 가는 증기선은
자주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다리는 동안 언더우드는 배 위에서
그리고 선원들의 집에서 특별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러던 중 한국인 이수정을 만났는데
그는 한국으로 전령을 보냈고
언더우드는 그와 함께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한국에 들어갈 때
그가 번역한 신약 마가복음을 들고 입국할 수 있었다

몇 달이 지나자
웬만한 예인선보다 별로 클 것이 없는 증기선이
한국으로 출항할 준비를 갖추었으므로
언더우드는 배를 타기 위해
항구도시에서 며칠 밤을 머물게 되었는데
일본말도 모른 채 낯선 집에서 일본인들과 함께 묵던
어느 날 밤
아주 경이로운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다

지갑을 머리맡에 두고 잠을 청했을 때
일본말로 불려지는 만세 반석(Rock of Ages)
부드러운 곡조가
한밤의 정적을 타고 은은하게 흘러나왔고
뒤를 이어 엄숙한 기도 소리가 들어 왔던 것이다

뜻밖에도 자신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흐뭇한 희열을 느끼며 언더우드는 소지품을 지키려고
깨어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단잠을 청할수 있었다

그는 한국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도처에서 들었다
로마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라든가
한국인의 야만성이라든가
한 그루의 나무도 없고  지저귀는 새도 없으며
한 포기의 꽃도 없다 는 것에 대해
그리고 최근에 서울에서 일어난
무시무시한 폭동(갑신정변) 때에는 일단의 혁명가들과
일본인들이 간신히 항구로 도망쳐 나와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 등이었다

그럼에도 언더우드는
한국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믿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확신 가운데
한국행을 단행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언더우드의 입국과 활동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주일 아침에
아펜젤러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했다

아펜젤러는 아내가 임신 중에 있었기때문에
입국을 연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미국 공관 폴크의 제의를 받아들여
일주일 후 아내를 데리고 일본에 돌아갔다가
2개월 후 다시 입국했다

이렇게 해서 그리피스가 말한 바
이 땅에 상주한 첫 안수받은 선교사가 된 언더우드는
4월 7일 서울에 도착해 4월 10일부터
광혜원에 약제사로 들어가
의학생들에게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면서
한국어를 배우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고
동시에 마가복음의 번역과 사전 편찬에 착수하였다

언더우드가 입국한 후
장로교 선교회의 헤론(Heron) 의사 부부가
6월에 도착하였고
에니 엘러스(Annie Ellers)는 국립학교 교사들과 함께
1886년 6월에 도착하였다



(1) 교육 사역
언더우드는 처음에 수술을 집도하는
알렌을 도우려고 했으나 피를 보고 두 번이나 기절해
할수 없이 내과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거의 동시에 경신학교의 전신인
존 디 웰즈 학교(John D. Wells School)를 설립해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독립 운동가이며 해방 후 입법의원 원장을 지낸
김규식이 부모를 잃고 가난에 굶주리고 있을 때
언더우드를 만난 것이 바로 경신학교에서였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양반으로서 관직에 있었는데
정치적 사건으로 말미암아 귀양을 갔고
모친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삼촌들은 생활이 궁핍하여
이 아이를 돌보려 하지 않았으므로
새로 건립된 고아원으로 그를 데려왔다

그러나 네 살짜리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어서
그 아이는 다시 친척들에게 돌려보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이가 몹시 아픈데도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언더우드는
자기 몸 역시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분유와 약을 들고 가마를 타고서
아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그 아이는 너무 굶주려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필사적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아이가 죽을 경우 언더우드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사들과 선교사들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언더우드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다가 극진히 간호하였다
결국 그 어린 생명은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이 아이는 빠른 속도로 영어를 익혔으며
마침내 한국 그리스도인 교역자 중에서 가장 성실하고
유능한 한 사람이 되어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교회나 YMCA(1900년 설립)에서도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으며
몇 년 동안 언더우드의 비서로서 일을 보기도 하였다



(2) 성경 번역 사역
학교사업 외에 1887년에는 성서번역을 추진하기 위해
상임성서실행위원회를 결성했고
1890년에는 문서 선교를 위해
기독교서회의 전신인 조선성교서회를 조직했다

성서번역은 언더우드의 필생의 사업이었다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성서번역에 온 정성을 기울였지만
특히 언더우드, 게일, 레이놀즈, 아펜젤러, 스크랜톤의
노력은 대단했다

한국에 도착한지 일 년 남짓 되어
언더우드는 아펜젤러와 공동 작업으로
마가복음의 임시 번역판을 출판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성경을 번역·출판·보급하는 데
열심이어서 아주 빠른 시기에
상임성서실행위원회를 조직하였다
(The 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

이 위원회는 여러 선교회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었다
위원회는 산하의 번역위원회를 통하여
번역 사업을 지도하고 통제하였으며
성서공회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인쇄와 출판을 지도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은
번역위원회 소속이었으며
언더우드는 일생 동안 위원장직을 맡았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죽을 때까지 아니 죽기까지 이 일을 감당하였다

그들은 주님이나 한국을 위해 일하는 데
목숨을 아끼지 않았으며
둘 다 이 일에 값비싼 희생을 지불했다

아펜젤러는 번역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에
익사하였으며
언더우드는 1915년 여름 휴가 때
가을과 겨울에 닥칠 과중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건강을 회복해 두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개의치 않고 번역 일에 몰두함으로써
결국 건강을 회복할 기회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성경 번역을
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로 생각하였다

사람의 수중에 있는 성경이
가장 훌륭한 설교를 할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그는 한국을 누비며
많은 성경을 배포 판매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인 권서인들과 여자 권서인들을 지도하는데
많은 관심을 보였고 성심으로 그들을 격려하였다

성경을 번역함에 있어서 번역자들이 정확을 기하기 위해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불어, 독어, 중국어로 된 성경과
영어 개역 성경을 참고서로 사용했다고
언더우드는 코리언 미션 필드(The Korean Mission Field)

에서 밝힌바 있다

또한 언더우드는 첫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 땅에 도착한 지 4 반세기도 안 되어
성경 전체가 한국인들의 수중에 들어갈수 있었다는 것은
결코 늦은 일이라 볼수 없다고 하면서
어떤 사람이 그만두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을 택해 보내 주시고
지혜와 은혜를 주시고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지도하신
위대하신 조력자와 교사셨던 주님이 없었다면
이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큰 은사를 주신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린다고 하였다



(3) 전도사역
언더우드는 개신교 선교사로는 최초로 세례를 베푼 인물이다
언더우드에게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인물은 노춘경이다
그는 외국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한국의 양반으로
특히 외국 종교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 종교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남들이 아는 것을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했다

바로 얼마 전에 그의 많은 동포들이 신앙을 고백하여
고문을 당하고 목이 잘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알렌 박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자신은 영어를 배우는 체 하면서
언제나 이 금단의 열매를 따먹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서재 책상에서 두 복음서를 훔쳐보게 되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이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새도 없이
급히 그 두 권의 책을 넓은 소매 속에 넣은 다음
훔친 보물을 들고 집으로 달려왔다

그는 이 책의 놀라운 매력에 사로잡혔다
이것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그의 마음에도
그저 아름다운 것일 뿐 아니라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밤새 그 책을 읽고
아침에는 그것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언더우드의 서재에서
용감하게도 복음이 좋고 웅대하며
죽든 살든 믿음을 갖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하였다

언더우드는 후에 이 일을 회고하면서
이 사람을 보면 우리는 마치 그를 뒤따를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어두운 한국에
동이 틀 날이 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 한 사람의 신자는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시려고 작정하신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임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고 하였다

노춘경은 1886년 7월 11일 비밀리에 세례를 받았으며
다음해 봄에는 또 3명이 세례를 받아
이로부터 첫 교회가 조직되었다

1887년 12월 언더우드의 집에서는
7명의 세례교인만이 참석한
한국 최초의 성찬 예배가 드려졌다

그 외에도 언더우드는
남장로교 선교회와 캐나다 선교회의
한국선교의 문을 열어준 인물이며
연합 선교의 이상을 통해 한국선교를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한국선교의 개척자였다

191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선교사로서, 학자로서, 교육가로서, 성경번역자로서
편집가로서, 여행가로서, 정치가로서
그리고 평화의 사도로서
그가 이룩한 업적은 가히 경이적이라고 할수 있다

한국의 초기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한국선교의 계획 이면에
언더우드의 신앙과 이상과 아이디어가 얼마나 많이
반영되어 있는가를 발견할수 있다

언더우드는 1889년 3월 명성황후의 시의였던
의료 선교사 릴리아스 호톤 양과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전도여행으로 떠날 만큼
복음의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언더우드의 생애에는 화란의 개혁파 경건주의,
화란개혁교회 교단과 뉴 브룬스윅 신학교의 개혁파
복음주의 전통 그리고 당시 미국에서 일고 있던
19세기 부흥운동의 전통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었다

(언더우드 가문 4대가 지금까지
                    한국 선교와 교육.통일을 위하여 힘쓰고 있다)




출처 : 살핌과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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