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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순교자 ?주영진 전도사 (주기철 목사의 장남)

° 키키 ♤ 2013. 8. 19. 01:55

 

 

순교자 주영진 전도사

(주기철 목사의 장남)

 

 

기독교인들에게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일사각오를 외친
평양 산정현교회 주기철목사(朱基徹·1897∼1944)를 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주기철목사의 장남이며
평안남도 대동군 김제면 장현교회에서 시무하던
주영진전도사(朱寧震.1919∼1950)는
아버지 못지않은 믿음으로 짧은 일생을 살다 간 순교자임에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친척인 우리들조차
주기철 목사님에 대해서는 알면서도
아저씨인 주영진 전도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지
순교의 죽음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주영진은 주기철목사가 1917년 안갑수와 결혼한 뒤
1919년 10월 2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서
아버지 주기철 목사와 어머니 안갑수 사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의 신사참배 반대로
창신소학교에서 퇴학
숭덕학교, 오산학교 졸업
일본 루터신학교 자퇴
일본 일치신학교 퇴학 당하였습니다 


주영진 전도사는 어린 나이에
마산 창신소학교에서부터 퇴학의 경험을 갖고 있었습니다

 

 

조회를 주관하는 선생은 학생들로 하여금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한 후 고개를 속여 절을 하게 만들었지만
주영진은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고
고개숙인 전체학생들 중에 한눈에 드러날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놈이냐!

저리도 방자하게 우뚝 서있는 녀석은


주영진은 우악스런 남선생에게 뒷덜미가 잡혀 끌려갔고
그날 온종일 복도에서 벌을 섰으며
학교가 파할 무렵 교장이 그를 불러
군은 왜 천황 폐하께 고개 숙이지 않는거냐?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우상?

 

그렇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가 누구냐

 

주기철목사입니다

 

오 그 악질 대역죄인의 아들...

그렇게 퇴학을 당하였습니다

 

남강 이승훈


주기철 목사님이 평양으로 이주하면서
수덕학교를 거쳐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를 진학하게되었고
음악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프랑스로 바이올린유학을 가겠다고 선언하기도 했지만
어느날 평양 주암산에서 열린 산상기도회에 3일간 참석한 뒤
목사가 되기로 결심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주영진 전도사가 애국애족의 사람이 된 것은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운학교이고
아버지 주기철목사가 나온 학교였고
산정현교회 장로였던 조만식이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고
오산학교 출신들이 한결같이 애국애족의 사람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려 했으나
평양신학교가 이미 폐쇄되었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면 학교를 다닐수 없기에
일본 동경으로 유학하여 루터교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고당 조만식

 

일본신학교는 신사참배가 더 심했고
궁성요배까지 극렬히 반대하는 그에게
학교는 퇴학처분을 내렸습니다

 

2학기만 마치면 졸업이었지만
주기철 목사님의 곧은 믿음을 보고 자란
주영진에게 타협이란 있을 수 없었으며
자퇴하고 일치신학교로 전학했지만
그러나 일본 경시청의 사주를 받은 학교는
주기철의 아들 주영진으로 하여금
반국민의 아들이기에 더 이상공부시킬수 없다
일본 일치학교에서 퇴학당한것입니다

 

1938년은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이
평양형무소에서 수형을 살던 때였습니다

귀국하여 갈데가 없었지만
경남 구포에 있는 애린원에서 총무로 봉사하고
어촌 어장일을 하는 등 이리저리 몸을 숨기다

1944년 4.19일 아버지 주기철 목사가 순교하자
아버지의 뜻을 이어 목회자로 나설 것을 다짐했습니다

 

한상동 목사

 

해방직후 한상동목사가 산정현교회를 돌볼 때
전도사로서 일을 도왔으며
1946년  새어머니인 오정모사모의 중매로
평양고등성경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기독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던
김덕성(金德聲)과 결혼을 했습니다

 

당시 28세의 신혼이 였지만
전도사 직함으로
평양에서 북쪽으로 50리 떨어진 긴재교회에 부임했습니다

 

 

당시 북한을 접수한 공산당은
보안서원들을 시켜 긴재교회 안에도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를 걸도록 권유했지만
이 말을 묵살 했다고 합니다

 

방문한 보안서원을 오히려 혼쭐을 내었지만
얼마있지 않아 형사들에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아내 오정모사모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주기철목사를 순교의 제물로 받으시더니
이제는 그 아들까지 허락하시려고 합니까
한없는 영광을 드립니다

다만 아들에게 어떠한 환경에도 변치않는
담대한 믿음을 주옵소서 하고 기도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선전하는 공산당이
목사를 잡아갔다며 여론이 좋지 않았기에

공산당에 협조할 것을 강요받으며
고문을 당하던 주전도사는 결국 30일만에 풀려났습니다


1946년 11월3일은 인민공화국위원 선거일이었습니다

주일날에 선거를 하기로 했기에
엄격한 주일성수를 강조하는 주연진 전도사가
성도들에게 투표에 참여하라고 말할리 없었음을 알고
형사들이 주영진 전도사를 찾아왔습니다

 

아무리 종교의 자유가 있어도
인민공화국을 반대하는 종교는 인정할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모두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선거가 아닙니다
거룩한 주일을 다른 일로 범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의 일을 이래라 저래라 광고하는 곳이 아닙니다

 

정 이렇게 나오시면 재미없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투표를 하지 않으면
선동죄로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저녁예배까지 본 뒤 투표를 하면 되지 않소

 

밤이나 낮이나 주일은 주일입니다

 

화가 잔뜩 난 형사는 이때부터 긴재교회를 예의 주시했고
장현교회로 목회지를 옮겨가서도
주영진 전도사에게 불순분자란 딱지를 붙여 놓았습니다

 

 


이후에도 주영진 전도사는 기독교연맹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다
강양욱위원장이 집까지 찾아와 부탁했으나
교회가 정치와 관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며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주영진 전도사가
6·25직전까지 큰 화를 입지 않은 것은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먼저 김일성정권은 항일투쟁에 앞장선
애국자를 크게 높이는 작업에 들어가
주기철목사가 일본에 항거한 애국자임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는 주기철 목사가 일제시 형무소에 있으며
주영하란 공산주의자를 같은 감방에서 만나 친하게 지냈고
해방이 되자 주영하는 인민공화국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주영하가 주기철 목사와 형제란 이야기가 나돌았기 때문이라 합니다

 


1950년 6월24일 북한 공산당은
그동안 당에 비협조적인 인사들을
모조리 체포하는 일체 검거령을 내렸고
남침에 앞서 남한에 협조적일수 있는 인물들을
숙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연히 주연진 전도사도 이 대상에 포함돼 있었기에
당시 신의주지역을 돌며
초교파적으로 부흥회를 인도하고 돌아오자
당시 담임하던 장현교회 성도들로부터 권유를 받았지만

나만 살겠다고 도망가진 않겠습니다

생사는 주님이 주관하십니다

다음 주엔 순교하신 방계성목사님이 시무하시던
평양 산정재교회에 가서 예배를 인도하겠습니다

 

산정재교회에서 마지막설교를 하던 주영진 전도사는
설교를 마치기 무섭게 두명의 형사들에게 잡혀갔고
그 뒤 주영진 전도사의 행적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달후 6.25의 전쟁이 일어났고
가족들이 월남할 때 그의 나이 32세였습니다

 

당시 잡혀간 사람들이 모두 총살형에 처해졌기에
주영진 전도사도 총살당했다고 보는 것이 거의 정확한 의견입니다

 


주광조 장로님은 말씀하시길
참 의연하고 신앙이 곧은 형님이셨습니다
당시 형수가 며칠동안 형님의 시체를 찾다가 못 찾았고
두 자녀와 피란을 내려오다
아흔이 넘은 조모가 힘들어하자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형수는 깊은 신앙을 가졌기에
아직 살아있다면 30여박스나 되었던
아버님(주기철목사)의 설교원고를 보관하고 있을 것 이라며
아버님의 뒤를 이은 형님도
남은 가족들이 항상 기억하고
그 곧은 믿음을 이어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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