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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삼일절 (三一節)

° 키키 ♤ 2013. 3. 5. 03:40

 

 

 

삼일절 (節)

 

 

1918년 1월 미국대통령 윌슨은 14개조로 된
전후(戰後) 처리원칙을 파리 강화회의(講和會議)에 제출하였는데
그 가운데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한다고 하는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원칙을 제창하여 민족 자결주의가 선포되었다

 

 

일제의 무력 식민 정치에 대한 항일 투쟁이
국내외에서 고조되어 가고 있을 무렵
1919년 1월 22일 고종 황제가 갑자기 승하하자
일본인들이 고종 황제를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우리 민족의 일본에 대한 증오심은 극에 달했다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500여명의 유학생들이
독립요구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에 조선에서도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여
남강 이승훈 선생이 앞장을 서서 민족대표 33인이 구성되고
거족적으로 민족해방운동으로
고종황제의 인산(因山=국장)일인 3월 3일에 전국서 만세를 부르기로 했다

 

 

3월 1일 정오를 기해 파고다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인쇄물을 뿌리고 시위운동을 펴기로 했으며
또 각 지방에도 미리 조직을 짜고
독립선언서와 함께 운동의 방법·날짜 등을 전달해두었다

 

 

독립선언서와 일본정부에 대한 통고문과
미국대통령·파리 강화회의 대표들에게 보낼 의견서는 최남선이 기초하고
비용과 인쇄는 천도교측이 맡아 2월27일 밤 보성인쇄소에서
2만 1천장을 인쇄하여 은밀히 전국 주요도시에 배포했다

 

 

손병희 이하 33명의 민족대표는 3월 1일 오후 2시 정각
인사동의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한용운이 독립선언서의 낭독을 끝내자 만세삼창을 부른 후
경찰에 통고하여 자진 체포당했다

 

 

파고다 공원에는 5천여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정재용(鄭在鎔)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후 시위에 나서자
수만의 시민들이 가담함으로써
서울시내는 흥분된 군중과 만세소리로 들끓게 되고
만세운동은 삽시에 전국적으로 번져나가
오후6시 진남포·선천·안주·의주·원산·함흥·대구등지에서 시위가 벌어졌으며
다음날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와 시위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만세운동을하기로 한 3월 3일은
고종황제의 국장으로 도리어 잠잠했으며
민족대표를 위시한 지도자 47명은 내란죄로 기소되었다

 

 

이후 독립을 외치는 만세소리는 전국으로 퍼져나가

이화학당을 다니든 유관순 열사가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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