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그 때 그 날~

[스크랩] 육영수여사 유년시절

° 키키 ♤ 2012. 10. 4. 21:53

 

 

육영수(陸英修,1925-1974) 여사

 

태통령 박정희(제5-9대)의 영부인

 

1.소녀시절

 

1925.11.29(음력 10.14)충북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313번지 덕유산 기슭에서 부친 육종관과 모친 이경령 여사 사이에 1남 3녀중 두째딸로 태어났다.태몽은《집마당으로 기어든 거북을 안고 안방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한다.

 

어릴때 《마음 착한 교동집 작은아씨》로 이름이 나 있던 육여사는 진흙 속에 물들지 않은 군자의 기품을 지닌 연꽃, 철 따라 피어나는 꽃밭의 꽃들 그리고 뒤뜰의 백년이 넘은 아름들리 은행나무, 감나무 속에 묻혀서 꿈 많은 소녀시절을 보냈다.

 

육여사는 소녀 때부터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다. 동생의 옷을 지어 주기도 하고 얌전하고 예의 바른 육여사는 다락에 가득 쌓인 현금관리를 맡기도 하여 살림꾼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육여사는 8세에 죽향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급우들은 모두 육여사보다 한 두살 많으면 5,6세 위였다. 제일 나이가 어렸고 키가 작은 육여사는 항상 앞자리에 앉았다.

 

비교적 말수가 적고 온순하여 언제나 웃음이 떠나지 않는 얌전한 학생이었다. 육여사는 다른 학생들에 비하여 부유한 가정으로 학용품도 넉넉했다. 육여사는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연필이 없으면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연필을 주는 것이 예사였다.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를 독차지 했다.

 

육여사의 성적은 45명중 언제나 5등 이내였다. 특별히 어느 한 과목에 치우치지 않고 전과목에 걸쳐 고루 성적이 좋았다. 죽향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 육여사는 친구들에게 장차 교사가 되겠다 는 꿈을 말하기도 하여 착하고 아름다운 인품을 소녀시절부터 보여 주었던 것이다.

 

2. 배화여고 시절

 

육영수 여사는 1938년 죽향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배화여자고등학교에 6대 1이라는 높은 경쟁을 거쳐 입학했다. 충청도에서 시골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온 유일한 입학생이었다.

1학년 때부터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육여사는 몸가짐이 늘 단정하고 당시 여학생들은 주름치마를 입었는데 주름이 한번도 펴진 것을 볼수 없었다. 특히 육여사는 머리 숱이 많았지만 항상 곱고 단정하게 빗은 모습이었다.

 

성격이 차분한 육여사는 늘 조용한 미소를 짓는 얌전한 학생이었으며 친구들과 다툰 적도 없었고 너무나 순진하여 소풍을 가 노래를 시키면 숨어 버리고 마는 성품이었다. 언행이 겸손하고 검소해서 육여사가 옥천의 부자집 딸이란 사실을 졸업할 때까지 모를 정도였다.

 

얌전한 모범생이던 육여사는 웃어른의 말을 거역하는 일도 없었고 졸업기념 수학여행을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어른들이 허락을 해 주지 않아 가지 못했다. 그러나 어른들을 원망하거나 불평을 하지 않았다.

 

육여사는 재봉과 수예에 뛰어나 전학년에서도 으뜸이었고 그래서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곧잘「시집가서 잘 살겠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졸업을 하고 육여사는 옥천으로 내려가 집에서 가사를 돌보고 있는데 옥천여학교에서 선생으로 나와 달라는 부탁이 왔다. 육여사는 청을 받았을 때 「자신이 없는데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 까」하고 망설였다. 매사에 조심하는 여사로서 당연한 걱정이었다. 학교에 나간 지 얼마 안되어 학생들은 육여사를 무척이나 따르고 좋아했다. 학생들은 다정하고 친절하고 상냥스런 육여사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군인의 아내

 

6.25사변이 일어나자 육영수 여사는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이 시절에 육여사는 박대통령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육본 정보국 제1과장으로 소령이었던 박대통령을 처음 만난 곳이 영도다리 옆 조그만 음식점이었다.육여사의 이종 6촌 오빠이며 박대통령의 대구사범학교 1년후배이자 직속부관인 송재천의 중매로 만난 것이다.

 

육여사는 박대통령과 첫 대면에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인상에서 일생을 함께 할 수 있는 반려자로서의 믿음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반대의 뜻을 비쳤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군인이고 전쟁 중의 군인에게 귀한 딸을 시집보내기가 안쓰러웠던 것이다.

 

결국 1950.12.12.육여사는 대구시 계산동 천주교 성당에서 결혼을 올렸다. 당시 박대통령은 갓 창설된 9사단 참보장으로 중령이었고 나이 34세이고 육여사는 26세였다. 결혼식 주례에는 당시 대구시장 이었던 허억(작고)이였다. 경북지사 조재천(작고)과 모교인 대구사범학교 재구 동창회에서 화환을 보내왔다.

 

하객으로 김재춘,왕학수(부산일보사장),김종면(서울신문사감사),박영옥(김종필 국회의원 부인.당시 미혼)여사 등 친척을 비롯하여 전국 대구사범학교 동창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들러리는 신랑 측이 대구사범학교 동창인 두 용규(대구시내 고교근무)와 정우 최호(예비역대령), 신부 측은 김재춘씨의 부인 장봉희 여사와 친동생 육예수 여사가 섰다.

 

육여사는 대구 시내의 현 관광호텔 자리에 있었던 조그만 한옥을 전세내어 신접 살림을 시작했다. 신혼살림은 퍽 어려웠고 육여사는 친정이 부자였지만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절약과 저금으로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갔다.

봉급에서 한푼 두푼 떼어 저금을 했고 당시 군인 가족들에게 나오던 쌀 배급을 아껴 모아 적금을 넣기도 했다. 그 돈으로 작은 구멍가게를 내어 살림에 보태었고 세퍼트를 사육하기도 했다.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 육여사는 결혼 6년이 넘은 56년 봄 서울 신당동에 20평짜리 조그만 양옥집을 장만하였다.

 

4. 청와대 생활

 

1963.12.17. 육여사는 38세에 제3공화국 대통령 영부인으로 청와대의 안주인이 되었다.육여사는 청와대 생활이 시작되자 세가지 일을 실천에 옮겼다.

 

첫째가 열심히 공부하는 일이다.

두번째가 많은 사람을 만나 시중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세번째가 청와대의 살림을 중류 가정 정도로 하는 것이다.

 

육여사는 사회 각층으로부터 들은 얘기를 그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되는 일이면 서슴없이 박대통령에게 직언했으며, 또한 솔직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때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박대통령이 들어주지 않을 때는《나는 정권 야욕도 조직도 없는 사람》이라고 슬기로운 우회작전을 펴기도 했다.

 

육여사는 새벽 6시부터 밤1시가 넘을 때까지 숨돌릴 겨를 도 없이 바쁜 생활을 해야만 했다. 늘 고된 하루였고 자녀들이 등교하고 난 7시 반부터 조반을 들기까지의 1시간 동안은 조간신문을 읽고 라디오를 들으며 대통령의 판단에 도움이 되도록 메모를 하거나 신문에 줄을 치는 일이었다.

 

9시경 식사가 끝나고 박대통령이 집무실에 들어서면 육여사의 민원처리가 시작되었다 하루에 50여통 이나 되는 서신을 일일이 읽어보고 정성껏 답장을 해주기도 하고 좋은 일도 베풀어 주었다. 바쁜 틈틈이 가족의 식단을 짜거나 옷가지를 매만지거나 실내장식에 마음을 쓰는 등 생활 주위의 정리를 했다. 그러면 점심시간이 되었고 박대통령과 함께 또는 혼자서 외부 손님을 초청하여 오찬을 나누였다.

 

하오는 접견 시간이었고 외국의 빈객을 비롯하여 사회 각계 각층의 인사들,각 단체의 간부나 회원들, 벽촌의 어린이들, 새마을 지도자들, 일반 서민층 주부에 이르기까지 접견, 그 수많은 손님들에게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했다.

 

하오4-6시까지 공부시간이었다 여러 전문 학자들을 초빙하여 세계사,문화사,종교사,역사,지리,철학,고고학,경제학,교육학,외교 정치사,시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공부를 했다.6시가 넘으면 가족과 함께 단란한 식사를 하고 때로는 예고없이 허물없는 손님이 동석하기도 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석간신문을 살피고 라디오 텔레비전의 뉴스를 체크하고,자녀들과의 대화,독서,하오에 도착된 편지를 읽는 등 밤 1시가 될때까지 일손을 놓을 수 없었다.외국을 방문하거나 청와대에서 손님들을 접견할 때에도 언제나 한복을 즐겨 입었는데 이는 우리 한복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널리 인식시킬 수 있었고 외국을 방문할 때마다 우아하고 매혹적인 영부인 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5. 자상한 아내, 평범한 학부모

 

육여사는 남편을 내조하는 것이란 적은 월급이라도 불평없이 살림을 꾸려가는 것부터 시작된다 고 누구에게나 말했다. 신혼초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아무 불만없이 무난하게 꾸려나갔던 체험으로 얻은 결론이었다. 부억 살림은 일반 가정과 차이없는 혼식과 분식이었고 육류보다는 채식을 하는 등 철저하게 내조 생활을 해 왔다.

 

평생 부부싸움 없는 내외간이었지만 육여사가 박대통령에게 불만스러운 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박대통령이 옷에 대하여 너무도 무관심해서였다. 넓은 넥타이가 유행하기 시작할때 육여사는 넓고 산뜻한 넥타이를 권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육여사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대통령의 육여사에 대한 애정은 은은했고 박대통령은 육여사에게 결혼 이후 한번도 생일선물을 잊은 적이 없었다. 박대통령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을 동안 닷새가 멀다고 편지를 띄웠다. 육여사는 3일만에 한번씩 일기 쓰는 식의 답장을 보냈다. 교육을 마치고 돌아올 남편을 기다리며 깊은 밤 혼자서 일기를 써나가듯 긴 편지를 쓰다보면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다 잊어버린 채 가정주부가 갖는 소박한 행복감에 가득히 젖어들곤 하였다.

 

교육을 마치고 귀국한 박대통령은 육여사의 편지를 받은 순서대로 스크랩을 하여 육여사로 하여금 감격하게 했다. 육여사가 박대통령에 대한 내조에 못지 않게 염려했고 힘을 기울렸던 일이 자녀교육이었다. 육여사는 대통령 영부인이기에 앞서 세자녀 근혜,근영양과 지만군의 인자하고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였다.

 

여사는 세자녀가 다니는 학교에서만 영부인이란 칭호를 절대로 쓰지 못하도록 했다. 선생님에 대한 지극한 존경과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열의와 관심이 다른 부모 못지 않은 모범적인 학부형이었다. 바쁜시간을 틈내 자녀들의 학교를 곧잘 찾는 육여사는 언제나 정문 밖에서 혼자 걸어 학교로 들어가곤 했다.

 

지만군이 청운국민학교 6학년 때 초겨울이었다 육여사는 느닷없이 학교를 방문하여 지만군이 수업을 받는 3층 교실을 찾아가 추운 복도에서 무려 30분 동안을 혼자서 기다리기도 했다. 담임선생은 지만군이 숙제를 해 오지 않은 날 손바닥을 때렸다. 이를 안 육여사는 저녁에 담임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 잘하셨습니다. 숙제를 안해 올 때는 사정없니 꾸짖어 주십시오. 어머니로서 미처 살피지 못해 미안합니다」하고 정중하게 부탁과 사과를 했다. 또한 학교에 가는 날이면 방과후 학교의 교실을 둘러보고 창문의 커튼을 거두어 손수 빨기도 했다.육여사는 비록 학교에 자주 찾아가지 못하더라도 수시로 전화를 걸어 자녀들의 학교생활과 학업성적을 자세히 묻는 자상한 학부모였다.

 

육여사는 박대통령이 청와대를 비운 사이 자녀들의 친구를 초대하는데 지만군이 초등학교 졸업반일 때 같은 학년 친구 전원(1천 1백명)을 불러 함께 잔디밭에서 뛰어 놀았다. 이때 육여사가 입고 나온 남색 치맛자락은 개구장이들의 손때가 묻은 까맣게 변했지만 아들이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육여사는 인자하면서도 엄한 어머니였다. 특히 자녀들이 특권의식을 가지지 않을까 항상 염려했다 여사는 자녀들에게 서민처럼 생활을 하라고 타이르기도 했다 자녀들이 통학을 할때에는 자가용을 태우지 않도록 고집을 했다. 근혜양이 원효로 4가에 있는 성심여자중학교를 통학할때 꼬박 전차나 버스로 다녔다. 이런 육여사의 검소하고 서민적인 어머니를 본받아 근혜양은 스타킹까지 꿰메 신고 다닐 정도였다.

 

근혜양이 대학을 진학할 때 육여사는 될 수 있으면 여성답게 인문계 학과(사학전공)을 택하길 바랐으나 우리나라 산업 현실에서 전자산업이라는 분야에 대한 앞으로의 기대가 크고 전자산업 분야에 참여해 보고자하는 딸의 생산적인 의욕과 주장을 존중해 대신 힘과 용기가 되어 주었다.

 

육여사는 자녀들이 학교에서 가지고온 시험 답안지를 비롯하여 학교 숙제와 그림 공작물,작문,성적표를 모두 모아 놓아 그것들을 자녀들이 결혼하게 될 때 어린 시절부터의 사진과 함께 며느리 사위에게 선물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6. 그늘진 곳을 찾아서

 

육여사는 양지회 설립을 비롯하여 어린이 잡지《어깨동무》의 창간, 서울 남산의 어린이 회관,어린이 대공원, 보광동의 정수직업훈련원, 서울대 기숙사인 정영사,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여성회관 건립 등에 이르기 까지 각가지 사회활동에 참여했다.

 

양로원과 고아원은 육여사의 따뜻한 손길을 받았고 전국 77개소의 음성나환자촌도 육여사의 방문을 받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렇한 육여사의 활동은 신문팔이 소년,낙도 어린이,정신 박약아,영세근로자,나병환자,윤락여성에 이르기까지 두루 미쳤다.

 

박대통령은 육여사 서거 다음날인 16일 밤 청와대 본관 빈소에서 밤샘을 하며『참 저 사람은 그토록 매사에 지성일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저 사람이 나병환자들을 위문하고 일일이 악수를 한 뒤 그 손을 나한테 그대로 내민 일이 있었다 그래서 나도 선뜻 그 손을 잡기까지 했다』고 회고를 하여 육여사의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희생정신을 다시 한번 엿 볼 수 있다.

 

7. 육여사의 일생 마침

 

1974년 8월 15일 해방 29주년 광복절 이었다. 육영수 여사는 이날 청와대에 와 계시는 어머니 이경영 여사에게 아침 문안을 드리고 하루의 스케줄이 바빴다. 10시부터 는 국립극장에서 거행되는 광복절기념식에 참석해야하고,11경부터는 지하철 개통식에,그리고 밤 6시반부터 개최되는 경축연회에도 참석해야 했다. 광복절과 지하철 개통이 겹친 축제 일색의 서울 거리는 태극기로 물결치고 있었다.

 

경축식전은 국립극장 대극장에 마련되어 있었다 1,494석을 수용하는 자리에 아래층은 주로 독립 유공자와 유가족들로 메워졌고 단상 바로 밑에는 시립교향학단이 차지하고 아래층 일반 좌석과 구분하여 사이를 격리시켰으며 왼쪽 앞자리에는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합창단이 자리잡고 있었다.

 

국회의원,장관,주한외국사절 등은 2층의 지정된 좌석에 해외교포들은 주로 3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극립극장 정면의 계단에 깔린 빨간 양탄자를 밟고 정문에서 로비로 들어선 대통령 내외분은 단상으로 통하는 복도로 걸어갔는데 대통령은 양태식 시장의 안내를 받아 앞서고, 육여사는 윤주영 문공부장관의 안내를 받으며 뒤따라 국립극장 단상을 향해 입장하였다.

 

대통령 내외분이 단상에 오르자 양시장은 해외에서 온 교포들의 자리를 알려 드리자 대통령은 3층을 향해 손을 저어 환영했다. 그때 경축객들이 총기립하여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10시 6분에 경축식이 시작되었다. 식순에 따라 국민의례, 애국가 제창에 이어 대통령의 경축사가 시작되었다.

 

대통령의 경축사가 진행되던 중 탕하는 총소리가 울렸다. 대통령은 듣지 못하고 경축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10시 23분 1층 장내 뒤쪽 해외교포석 끝 부분에서 1미터 70센치 가량의 검은색 양복에 안경을 쓴 괴한 청년(후에 문세광)이 불쓱 일어났다.

 

범인은 연단 뒤쪽 육여사 좌석을 향해 다시 2발을 발사 하는 순간 독립유공자 좌석에서 발을 내밀어 범인은 권총을 든채 쓰러졌다 육여사는 경호원들에 의해 곧바로 서울의대 부속병원으로 옮겨져 약6시간 가량의 두부관통 총창수술을 받았으나 왼쪽 뇌정맥 출혈이 심하여 같은날 저녁 7시경 육여사는 운명하였다.

 

장례식은 1974.8.19.에 거행되었는데 영구차가 장지로 향하는 연도에는 도열한 애도하는 수백만명의 국민들이 육여사의 마지막 길을 지켜 보고 있었으며, 영구차가 오전 11시 50분 영결식장를 떠나 시청앞 ->서울역 앞->제1한강교를 지나 2시 35분경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늘진 곳에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아끼지 않았고, 목련꽃 같이 화사하고, 학(鶴)과 같이 고우며, 인자한 성품을 지닌 영부인이 탄화로 인하여 영면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8. 주요 유적지

 

충북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313 생가(충북도 지방기념물 제123호)

 

서울시 종로구 필운동 12 배화여고 육영수여사 기념관(1977.8.20)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 국립현충원 유택

출처 
[기타] 인터넷 :http://yukyongsoo.or.kr, 도서: 육영수여사전(1980.대일서림)


출처 : mmaa56
글쓴이 : 산여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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